괴담

여기서 가장 무서운 괴담을 말한 사람은 식대 면제 - 06

고삼이 2021. 3. 28. 23:58

출처: 네이버 블로그

저는 이전부터 친구C가 좀 민폐를 끼치는 아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사람을 까맣게 태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친구C : 지금 당장 그 창혼(唱魂)의 주문을 알려 달라.
친구A :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알면 위험하다니까?
친구C : 내가 위험해진다고 당신이 어떻게 되는건 아니니까 빨리 가르쳐 달라.
친구A : 지금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친구C :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다니 내 호의를 짓밟고 있는게 아니냐. 지금까지 나는 당신에게 아주 잘 대접해줬으므로 그 답례로 창혼의 주문을 알려 주는건 마땅하지 않는가.
친구A : ...

그런 이야기를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매일매일 반복했습니다.
친구A도 몇번은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어느 한계에 이르러서는
"가르쳐주는게 나에게는 더 이로운게 아닌가?"
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화음이쟝 : 친구C를 어떻게 해야 하는거 아닐까
친구A : 걔가 이렇게까지 애걸복걸하면 그냥 가르쳐 줘도 될거 같은데.
화음이쟝 : 무슨 소리야?
친구A : 의식을 치루지 않은 사람이 창혼의 주문을 외우면 빠르게 죽는건 사실이다. 그런데 죽기 전까지 주문을 외워주면 외워줄 수록 나에게 주어지는 부담도 줄어들지 않는가
화음이쟝 : ....
친구A : 굳이 불구덩이에 머리를 처넣겠다고 하는데 열심히 말릴 필요는 없겠지.

친구A의 차가운 태도에 저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A는 친구C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아이일지언정 외톨이로 두는 건 불쌍하다고 모임에서 받아줬고
친구C가 아무 생각 없이 상처주는 말을 하더라도 변호해 주던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나 돌변했다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얼굴, 목소리, 모습은 이전과 그대로였지만 마음의 깊숙한 부분 어딘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저는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는 핑계를 대며 모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학기가 슬슬 중, 후반으로 넘어갔을 즈음, 친구B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 커피나 마시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모임에는 발을 끊었지만 친구B와는 이전부터 오타쿠 친구로 별도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설마 또 창혼 사건이겠어?
헌터헌터 호모 썰이나 풀겠지.
하고 쭐래쭐래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친구B가 자리에 도착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을 무시무시하게 느꼈습니다.

친구B는 저와 마찬가지로, 초콜릿과 튀김을 굉장히 좋아해서
만날 때에는 저렴한 경양식 식당에서 돈까스 한판을 남김없이 썰어먹고 바로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초콜릿 아이스크림 세트같은걸 뚝딱 퍼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에 혈색이 돌고 얼굴 살도 통통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달간 못알아 볼 정도로 헬쓱해지고 눈이 퀭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어딘가 걸음걸이도 비틀비틀하고, 눈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뭔가에 취해보였습니다.

저는 무슨 약이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친구B는 저를 보자마자 쇼핑백에 담겨진 무엇인가를 건네주었습니다.
묵직해서 들어보니까 그 안에는 대량의 동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전부, 제가 이전부터 좋아한 작가이거나, 인터넷에서 유명한 일본 오오테 작가의 동인지, 트윈지, 합본 등등이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니까 친구B는
"내가 죽고 부모님이 방을 정리하다가 이런걸 보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가져."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째서 죽는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하는거야?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일단 병원에 가자"
라는 취지로 대답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병원에 가자는 말을 장황하게 했습니다.
친구B는 병원은 필요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B : 나도 창혼의 주문을 읊었거든.

머리가 하얗게 질려서 친구B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제가 굳어버린건 아무렇지도 않게 두고 친구B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친구B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친구C가 친구A로부터 마침내 주문을 들었을 때 사실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다.
친구A에게는 "다른 사람이 주문을 외워줄 수록 소모되는 부담이 1/N으로 줄어드니까 상부상조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만약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함께하는 거니까 외롭지 않아" 라고하자 술술 가르쳐 주더라.

사실 나도 반드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주문을 받아서 그 사람에게는 "매일밤 외우면 재물복이 찾아오는 주문"이라고 했다.
혹시나 외우지 않을까봐 이메일과 문자에 시간 설정을 걸어서 며칠에 한번씩 주문을 적은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서 무심코 읽게 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천천히 쇠약사 하는 중이다.
계속 무엇인가 무서운 것에 쫓긴듯이 술만 퍼마시고 있다.

...그리고 악령은 자신에게도 나왔다.

외관은 사람 시체 여러구를 조각조각 해체한 고기덩어리를 눈을 감고 한데 뭉쳐 놓은 모양으로
새하얀 흰 떡같은 고기덩어리에 부풀어 오른 것처럼 팔과 다리가 여러쌍 이곳저곳 대충 붙어서 쓰윽, 쓰윽 기어다니는데 기어다닐 때마다 팔과 다리가 있을 수 없는 모양으로 구부러져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죽었을 때 별도로 매장된 게 아니라 한꺼번에 구덩이에 파묻혔기 때문에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겠지.

무서운데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 고기덩어리는 무엇을 찾으려는 듯 좌우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주변을 비틀비틀 기어다니다가 마침내 자신을 발견하고
고기덩어리가 몸 한가운데를 깊숙히 숙이고 그곳에서 솟아오른 머리로 자신의 얼굴을 주먹 하나 들어갈 거리에서 바싹 들여다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입같은 구멍에서 아. 아...하며 가래가 섞인 듯한 아저씨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이려고 한다...

....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아득히 상식에서 떨어진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못차리자 친구B는 용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친구B: 너도 혹시 알고 싶니? 언젠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길 수 있잖아.

저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못하고
"일단.. 병원에 가자... 입원을 하면 어떻게든 될거야..."
같은 바보같은 말만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친구B는 더이상 물어보지 않고 얌전히 커피만 마시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품에는 친구B가 준 오오테 동인지만 남겨져 있었습니다.
동인지도 돌려주고 싶었는데
"혹시라도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부모님에게도 유품으로 이런게 남겨지면 면목이 없으니 몇달만 보관해 줘라. 살아 남으면 반드시 찾으러 가겠다. 그 전까지는 마음대로 읽거나 번역해도 괜찮아"
라고 해서 일단은 제가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말.
한가롭게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다가 얼마 전 친구B로부터 받은 동인지 쇼핑백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는 기분 나빠서 방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었는데
그래도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가 동인지도 들어 있어서 한번쯤은 읽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일본 동인지라서 한국어처럼 편하게 읽지는 못하고 주의깊게 한글자 한글자 정성들여 읽으며
마침내 클라이맥스까지 도달한 순간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다음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저는 페이지 한 가득

한글로 적혀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B의 필체이고 주문의 내용이라는 것을 눈치 챈 순간
저는 그 즉시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러나 첫 구절을 읽을 때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손 몇개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제 목을 조여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나중에 죽는다면 외관상으로는 발광해서 죽든, 자살해서 죽든 형태는 다양하더라도
실질적인 원인은 그 손 때문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쇼핑백을 뒤집어 엎어보니,
친구B는 모든 오오테 동인지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마다
매직으로 창혼의 주문을 두껍게 적어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친구B가 무슨 심정으로 아끼는 동인지에 자기 손으로 저주를 적어놓았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를 속여서 주문을 억지로 읽히려고 했던 이유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친구A, B, C는 밤마다 모여서 함께 창혼의 주문을 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귀신에게 친구를 빼앗겼다고 할 수 있을까요.


후일담이라고 해야 할까.

저는 이 사건 이후로 한국 오컬트 사이트에 일절 들어가지 않습니다.
게시판을 보다보면 "사령을 만들 수 있다"든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면서 별의별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문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혹시 인터넷으로 거짓말을 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C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주술"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본 2CH 괴담 번역을 시작했으니 피차일반이긴 하군요.

이쯤 되면 괴담이라고 할 만하죠?
다음편에서 계속